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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un Architecture/fun news

I ♥ 건축 - 잘못된 민주주의 <MK오피니언 2014-12-18>

 

 

 

1교시 시험이 끝났다. 학생들이 복도에 모여서 이야기를 한다. “아까 10번 문제 정답이 뭐냐? 1번 아냐?” “3번인 거 같은데?” “맞아. 나도 3번 썼어”. 이때 전교 1등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그거 난 4번으로 썼는데”. 상황 종료. 누구나 다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누구나 의견은 낼 수 있지만 정답은 다수결로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전교 일등이 맞힌다.

몇 달 전 기업 건축 프로젝트의 공모전 심사에 참여했다. 일체의 외압이나 청탁이 없는 공정한 심사였다. 그러나 문제는 심사위원의 3분의 2가 내부 경영진 임원이었다. 사용자 및 운영자 입장에서 심사를 하겠다고 참여한 것이다. 그분들이 하는 질문이나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임원들은 금융은 전문가이겠지만 건축에 대해서 문외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쉽게도 필자가 보기에 군계일학으로 훌륭했던 작품은 낙선됐다.

가끔씩 건축공모전에 발주처가 더 많은 심사위원을 차지하는 경우가 있다. 필자도 CD를 사서 음악을 듣는 소비자이자 음악애호가이다. 그러니 권위 있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나가서 한 표를 행사한다면 어떻게 될까? 제대로 된 연주자가 1등이 될 수 있을까? 필자가 심사를 하는 순간 세계적 콩쿠르는 ‘나는 가수다’가 되는 거다. 병원에서 수술할 때 환자 보호자들이 수술 방식을 토론하고 결정하지 않는다. 수술은 의사의 전문 분야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비민주적이라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건축은 누구나 다 사용한다. 그렇다고 사용자 모두가 좋은 건축을 보는 재능이 있거나 훈련되어 있지는 않다. 자칫 어설픈 민주주의는 그릇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얼마 전 ‘대한항공 땅콩 사건’이 있었다. 활주로 위에서도 전문가인 기장에게 권한을 넘겨주지 않고 비전문가가 주인 행세를 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건축 분야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건물은 한 사람의 소유가 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전문가 의견에 경청할 줄 아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