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기간 | 2009년 3월 13일(금) - 4월 3일(금) |
* 참여작가 | 금혜원, 손유미, 안세권, 이문주, 이혜인 |
* 전시정보 | open_2009.3.13 (금) 6pm 작가와의 대화_2009.3.13 (금) 6:30pm 매주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
1.도시―캔버스의 출현
도시가 캔버스에 포착된 것은 꽤나 오래되었지만, 적어도 한국미술사에서 도시가 전면적으로 제시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캔버스 위에 안착했던 세계는 대부분 ‘고향’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공간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이상적인 자연의 풍광이 지배적이었다. 1980년대의 어법조차 ‘도시’ 그 자체는 배경 혹은 후경에 자리하고 있었을 뿐 도시가 캔버스에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한편으로 기하학적이거나 추상적인 캔버스가 출현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도시’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미술사 내적 어법에서 비롯된 문제로만 받아들여졌다. 말하자면, 그 평화로운 ‘대지―캔버스’에 ‘도시’는 등장할 수 없었고 그러므로 철저히 은폐되었던 것이다. 대체 캔버스 위에서 우리에게 도시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캔버스가 의식적으로 포착한 농촌과 같은 공동체와 이상적인 자연의 세계는 도시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그 세계는 제 힘을 잃고 만다. 수많은 화폭에 등장하는 자연과 공동체적 세계, 즉 현실에서 지워지는 세계를 담아냄으로써 그 세계를 복원하는 데에 집중했기 때문에 ‘도시’ 자체가 캔버스에 등장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80년대의 엄혹한 세계의 캔버스에서 도시가 후경으로‘만’ 배치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도시 그 자체가 시선에 포착되기보다는 도시적 삶에서 소외되는 존재들 그러니까 ‘인물’이 더욱 중요하게 취급되었을 따름이며 이는 도시적 삶을 영위하는 ‘주체―인물’에 보다 방점을 찍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세계에 짓눌리거나 혹은 변혁해야 할 그런 주체의 어두운 얼굴들을 기억해보라.
그런데, 지난 세기의 캔버스를 지탱한 것이 실제로는 캔버스에 전경화(fore-grounding)되지 않았지만, 은폐되었던 ‘도시’였다는 진술은 미묘한 관점을 제기한다. 즉, ‘인간―주체’가 자율적인 능력을 통해 세계를 창조한다는 부르주아적 이상이 실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인간이 생산했다고 믿은 ‘도시’가 도리어 인간을 생산했다는 층위로 옮아간다는 것이다. 아니, 자연을 탐구하거나 인간을 성찰하던 캔버스 대신에 인간을 생산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지평인 ‘도시’ 그 자체를 포착하는 캔버스가 마련될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문제를 응시하기 위해 기왕의 캔버스를 통해서는 부족하며 다만 ‘도시―캔버스’를 경유함으로써만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도시―캔버스’가 여러 가지 내용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문제와 맞닥뜨릴 수 있는 ‘눈’을 제시하는 일은 좀 더 고통스러운 삶의 국면들과 마주하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캔버스’를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지평을 성찰하는 일, 그것이 삶의 무수한 켜와 고통을 마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 백 년 동안의 고독
도시의 개발과 변화가 도시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이 마냥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시의 변화는 늘 자본의 순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도시와 도시의 구조적 변화는 자본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도시에 거주하는 존재의 양상과도 분리될 수 없다. 도시의 구조적 변화는 그런 점에서 존재론적 질을 변화시키며 동시에 도시적 삶을 영위하는 주체들의 형식을 새롭게 구조화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도시의 변화가 자본에 의해서 폭력적이고 급격하게 이루어질 때, 도시에서의 삶이 아무리 편리하다고 하더라도 도시에 거주하는 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모두 지우면서 진행될 가능성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니, 개발논리로 점철된 도시에서 주체는 기억을 유지할 수 없으며 기억을 보존해줄 장소는 항상 훼손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시인에게 ‘망각’과 ‘고독’은 필수적인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도시의 ‘망각’을 애써 기억하는 장소로서 이혜인의 도시―캔버스에서 ‘통증’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통증’은 도시화 혹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소외’를 넘어선 것이다. 이혜인의 작품에서는 ‘소외’된 인간이 아니라 이미 도시 내부의 ‘부속품’이 되어 버린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관람객을 향해 달려오는 철도―괴물은 인간의 눈과 다리를 선취하고, 황무지에 새로 들어서는 건물은 웅크린 인간의 몸을 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도시의 변화과정은 찬란한 빛을 희망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것이 간과하고 혹은 그것에 완전히 포섭된 인간을 보여준다.
도시적 삶에 완전히 포섭된 인간들에게 공동체의 훼손, 뿌리 뽑힌 삶, 불안한 거주 등 이 모든 것들은 역설적이게도 하나의 자연, 마치 삶의 진실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며 달리도록 강제한 과잉 속도체제가 저 멀리 내던져버린 ‘상처’들이 돌아오는 지금, 이혜인에게 기하학적으로만 달리도록 맞추어진 폭력적 시간체제와 속도의 파괴력은 흘러내리는 물감 혹은 도시―기계의 부품이 되어 버린 인간의 신체를 통해서 도시적 삶의 ‘통증’을 확인할 수 있다. 아니,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유일한 원천이 ‘통증’과 그 반응이라고 말한다고 해야 하겠다.
‘망각’이 초래하는 ‘고독’이라는 깊은 침묵은 도시를 살아가는 주체들에게 깊이 내면화된 것이다. 즉 삶의 ‘기억’을 ‘망각’할 수밖에 없는 주체들에게 도시적 삶은 ‘고독’ 그 자체인 것이다. 손유미에게 도시의 기억은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진 삶의 터전, 즉 다닥다닥 붙은 산동네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하늘을 향해 나아간 집들은 이미 근대적 도시가 배제한, 그럼에도 애써 눈감아준 도시적 삶의 이면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여전히 사람들의 삶이 지속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도시경관과 결부된 이 공간들은 새로운 자본에 의해 잠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그렇지만 손유미는 이 장소를 대상화하기 보다는 수많은 사진들의 절단을 통해 간결한 프레임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손유미의 사진 작업은 똑같은 공간을 영상으로 찍은 작업으로 이어질 때, 좀 더 완결된 서사를 구성해 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영상은 전체적인 풍경을 잡아내는 것을 포기하며, 또한 서사를 생략하는 읊조림(내레이션)을 구사한다. 파편화된 풍경과 분절된 언어는 그녀가 내면화한 선험적인 삶의 양식 혹은 산동네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며, 낮은 시선과 낮은 목소리로 삶의 터전으로서의 도시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다스려질 수 없는 자들 혹은 침묵하는 목소리들이 프레임 바깥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3. 침묵의 풍경(들)
근대적 도시의 성장과 발전이 저 먼 곳의 ‘유토피아’를 상정하고, 적어도 암묵적으로 바깥으로 내몰리는 자들에 대해 공동의 침묵으로 일관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이곳의 발전을 위해 내몰려야만 했던 장소들 혹은 사람들, 이전에는 이러한 현상이 어떤 지역의 특수한 사례로 이야기 되어왔다면, 현재 이러한 변화들은 전지구적 흐름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로의 급속한 변화가 이제 특수한 어떤 특정한 국가체제의 변화만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모든 구체적 장소에 사는 삶의 변화를 추동한다는 사실. 난민, 철거민, 노숙자, 부랑자는 어떤 구체적 도시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도시의 문제라는 것. 따라서 슬럼은 국지적 사례가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외부를 상상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며, 어느 도시에서든 슬럼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니 슬럼을 통해서 우리는 도시의 생성과 파괴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예술 언어 내부로 적극적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 이렇게 전면적인 도시의 풍경을 그리고 찍는 작품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공동의 문제의식이 개별작품으로 생산된다는 것은 여러 개의 ‘시선’들이 현실에 개입하고 혹은 현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짚어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은 그러한 풍경들을 피해갈 수 없고, 그리고 그것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도시가 이미 거대한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주체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환원될 수 없거나 고정된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부유하는 ‘눈’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도시라는 거대한 체계를 재현하며 도시의 풍경을 생산한다. 특히 이들의 작업은 도시의 경관과 결부되어 있다. 물론 도시경관은 국가나 시가 주축이 되어 사실상, 도시약탈을 도시재건이라는 명목으로 변화시키는 풍경이기도 하다. 또한 생성과 파괴, 새로운 구축은 도시(자본)의 생리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도시경관은 매번 눈을 의심하게 만들고, 아니 시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들, 삶의 배치들을 급속하게 회전시켜 버리기도 한다.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풍경으로 잡아내는 작품들에는 삶의 미세한 변화들은 감지되지 않지만, 도시 그 자체가 괴물이 되어 우리 앞에 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를 거대한 콜라주로 바라보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아니 이미 도시가 여러 겹의 시․공간 혹은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문주의 작업은 콜라주와 같은 도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질적인 시․공간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콜라주는 낡은 전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압도적인 도시―괴물을 생산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도시―괴물은 이문주의 작품이 보여주듯 재개발로 인해 해체된 혹은 쓰레기 더미가 된 삶의 터전을 암시한다. 모든 것이 파괴된 그 상황을 보여주는 이문주의 작업이 도시의 생리를 어쩌면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식의 작업이 표면적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도시―괴물을 사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일 수도 있다.
회화적 장치와 여러 매체를 이용해 슬럼화된 도시를 재현하는 이문주가 도시를 콜라주로 나타냈다면, 안세권과 금혜원은 카메라―눈을 통해 적극적으로 슬럼화된 도시를 생산의 층위로 옮겨 놓는다. 이들의 도시―캔버스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획득된다. 즉 카메라―눈을 이용해 하나이지만 다른 도시의 면(面)들을 드러내 보인다. 어쩌면 카메라―눈은 인간의 ‘눈’이 잡아내지 못하는 풍경을 잡아내는 데 용이하게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도시를 가장 정치하게 잡아내는 장치로 카메라―눈은 맞춤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세권의 깊은 심도, 금혜원의 파노라마적 장치는 도시의 풍경을 단순하게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있다. 이들은 재개발이 진행되는 장소로 들어가 변화의 과정을 담아내고 덮 힌 장막을 드러내 보인다.
안세권의 카메라―눈은 침묵하는 시간을 담아낸다. 그는 청계천 복개공사주변을 2001년부터 4년간 사진과 영상작업으로 담아냈고,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서울시의 뉴타운 프로젝트의 하나였던 월곡동 재개발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러한 일련의 시간동안 담아낸 도시의 풍경은 침묵하고 있는 혹은 모든 것이 소멸하는 시간을 공간화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생산한 도시는 일견 스펙터클한 경관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폐허의 시간은 현실을 넘어서 있으며, 그가 천착하는 세계는 빛을 머금은 어둠의 시간이다. 그가 밤의 풍경에 방점을 찍는 것은 생동하는 도시의 이면을 담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소멸한 시간 혹은 그러한 공간은 인간의 흔적이 사라져 버린 침묵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밤의 탐색자가 되어 도시의 이면과 마주하려는 그의 카메라―눈은 압도적인 도시―괴물의 위력을 감지하도록 만든다. 아주 깊은 심도는 찢어지고 뜯겨나가는 도시의 내부를 오히려 정확하게 담아낸다.
금혜원은 인간의 눈이 체 담아내지 않는 혹은 그렇지 못한, 하나의 소실점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래서 무한한 지평으로서의 도시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렇게 펼쳐진 세계는 파노라마적인 시선을 드러내며, 재개발이 진행되는 공간은 마치 푸른 천막에 가려져 있는 거대한 설치작품이 되어 버린다. 이 푸른 막은 온전히 도시가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 진보적인 역사관 아래 놓인 유토피아로를 상상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푸른 베일이 평화로운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며, 금혜원은 예술적 개입을 통해 이러한 폐허의 경계를 드러내며, 그러한 시간의 현존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그녀에게 도시의 생성과 변화는 은폐된 과거, 우울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4. 예술―정치를 향하여
도시―캔버스의 출현은 최근 미술 언어 내부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도시담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도시를 그리고 찍는 회화와 사진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은 ‘도시’를 통해 주체가 서 있는 그 자리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도시―캔버스’의 출현은 삶의 기반이 되는 외부를 자각함으로써 내부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재현을 통해 드러난 도시 이미지들은 자본과 기술․기계문명의 발전이 가져온 낙관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빼앗아간 혹은 채우지 못한 잉여들(아니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을 드러내 보인다는 사실이다. 도시의 생성과 파괴는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삶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렇게 반복되는 생성과 파괴가 도시의 기본적인 변화라고 가정할 수 있지만, 이것은 결코 낙관적인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다. 폐허 혹은 슬럼화된 도시는 유토피아가 아닌 지금 이곳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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