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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un Architecture/fun news

20년 전, 건축계 4·3그룹을 아시나요?

 

 

ㆍ승효상·조성룡·김인철·민현식 등 당시 3040 건축가 13명 모임
ㆍ세미나·건축 기행 등 통해 “문화로서의 건축, 대중과 소통”

ㆍ건축사적 의의 돌아보는 책 발간

1990년 4월3일, 30~40대의 젊은 건축가 13명이 서울 강남 올림피아센터에 모였다. “문화로서의 건축과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한 스터디 그룹”을 만들자는 명목이었다. ‘4·3그룹’이라 불린 이 모임은 불과 3~4년 뒤 흐지부지됐지만 승효상, 조성룡, 김인철, 민현식 등 이후 20여년간 한국 건축계의 핵심 인물들을 배출했다. 목천건축아카이브의 후원으로 출간된 <4·3그룹 구술집>(마티)과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집)을 보면 이들의 건축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등은 88올림픽을 전후해 건설 경기가 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현대건축의 두 거두인 김수근, 김중업은 1986년과 1988년 잇달아 타계했다. 지을 건물은 많은데 설계할 사람은 적었다. 젊은 건축가들이 활약하기 좋은 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4·3그룹이 건축계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예술가 혹은 사상가로서의 건축가상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주된 활동 역시 세미나와 건축기행이었다. 우경국은 “그 당시엔 비평문화가 약했으니까 ‘서로 비평을 하자’며 자기비판을 하자는 얘기였어요”라고 돌이켰다. 이성관이 설계한 전쟁기념관을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전쟁을 기념해야 하는가’라는 원론적 이야기에서 시작해 건축가의 재량이 적은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하는지까지 회원들끼리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다. 승효상은 “(이전까진) 남이 건축을 하는지 알지도 못했어요. (…)그 과정(회원들과의 토론)을 통해서 내가 나를 알아가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정부의 해외여행 자유화와 맞물린 건축기행은 회원들의 시야를 넓혔다. 이들은 도쿄, 베니스, 파리, 런던, 바라나시 등을 답사했고, 이타미 준과 시게루 반 등 해외 건축의 거장들을 만났다.

1992년 12월 서울 동숭동 인공갤러리에서 열린 ‘이 시대 우리의 건축’ 전시회는 4·3그룹 활동의 절정이었다. 이전까지 건축전시회는 도면·스케치를 내놓는 정도였으나, ‘이 시대 우리의 건축’전은 오브제 형식으로 만든 모형을 전시했다. 승효상의 ‘빈자의 미학’, 민현식의 ‘비움’ 등 이후 건축가들이 스스로를 규정 지은 개념어를 내놓은 것도 이 전시회에서였다. 옛 관습을 철폐한다는 차원에서 통상적인 테이프 커팅을 하지 않았고, 전시회 빈 공간에선 연주회를 열었다. 동숭동의 포장마차를 통째로 불러 케이터링 서비스를 하는 파격도 있었다.

회원들 모두 소규모 설계사무소를 운영했기에 대규모 공공건축에는 참여하기 힘들었다. 더욱이 공공건축은 설계부터 시공까지 한 회사가 모두 맡아서 하는 턴키 방식으로 발주되곤 해 대형 설계사무소에 유리했다. 대신 4·3그룹 회원들은 개인 주택, 기업 건축 등을 통해 자신들의 건축세계를 정립해 나갔다. 승효상의 수졸당, 민현식의 신도리코 기숙사 등이 90년대 4·3그룹 회원들의 대표작이다. 이들은 2000년대 들어서야 선유도공원(조성룡), 파주출판단지(승효상) 등의 공공건축에 참여했다.

박정현 건축평론가는 “4·3그룹은 90년대 이후 한국 건축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라며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이들은 후학 양성에도 적극 나서 이후의 건축학과 커리큘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배형민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는 “4·3그룹 회원들의 건축은 형태적으로 단순하고 공간적인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큰 흐름을 공유한다”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4·3그룹 회원들은 모두 60대 이상이 됐다. 건축계의 헤게모니도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2006년과 2008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는 각각 조성룡, 승효상이었으나, 올해는 40대의 조민석이 맡았다. 배형민 교수는 “4·3그룹은 건설, 부동산의 측면에서 조명되던 건축을 문화적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건축 언어를 개념화해 대중과 소통하려 한 최초의 움직임이었다”고 평가했다.